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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첩 반상

소설

by 안노27 2024. 5. 7.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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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은 삶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 삼십 년도 훨씬 넘게 걸렸다. 오만과 자만에 똘똘 뭉쳐 그랬다. 하루 세 끼 밥상이 무한한 생명을 유지시키고 탄생하게 만드는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따위 세 끼 밥상, 콧방귀를 꼈다. 나는 그보다 훨씬 고귀하고 더 가치 있으며 더 숭고한 삶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십 대에는 멋진 워킹 우먼이 되고 싶었고, 이십 대에는 사랑에 빠졌고, 삼십 대에는 돈에 허우적댔다.
 
“밥 먹었니?”
 
할머니와 어머니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이 한 마디를 온 몸으로 거부하며 살았다. 밥 먹었니. 밥 따위 먹지 않았다, 밥 따위 먹지 않겠다, 그러니 밥 따위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진부한 논리였다. 그 때는 가장 진보적인 논리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정말 그랬다.
 
그런데 정말로 밥 따위조차 한 알도 입에 넣지 못할 쇼크 상태가 찾아왔다. 숭고한 밥상에 대한 무시와 오만에 대한 저주라도 받은 것 같았다.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나는 도저히 쌀 한 톨도 입에 가져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밥상은 사랑이며 관계며 가정이며 평화라는 것을 ….
 
 
쌀밥과 사랑은 동격.
 
* 쌀밥 짓기 노하우: 손등이 찰박할 만큼 물을 붓고 끓이기와 찌기의 중간 기술로 센 불 에서 은근한 약불 까지 탁월한 불 조절로 짓기.
* 사랑 짓기 노하우: 적당한 감정 농도를 풀어 너무 멀지도 또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기.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싯뻘개지더니 쇼핑백을 내 가슴팍에 내던지고 가 버렸다. 왜? 모처럼 휴일 오후, 백화점 삼층 가구 전시관 입구에서 당황해 눈물이 날 뻔했다. 몸통보다 커다란 쇼핑백을 둘러메고 진열된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과 일 분 전 일을 되감기해 보았다. 머릿속으로 수 십 번을 되감아 봐도 나는 결백하다. 오전에 만나 좋은 영화 보고 그녀가 좋아하는 파스타 먹고 백화점에서 하늘거리는 원피스까지 샀는데. 이 정도면 완벽한 휴일 데이트가 아닌가. 그런데 왜 저러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개운치 않았다.
 
“편안하시죠? 사백 이십 만 원입니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떠 보니, 모델 같은 라인의 판매원이 양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서 있었다.
 
“제가 뭘 실수 했을까요?”
 
판매원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고객님! 본의 아니게 들려온 단어를 조합해 볼 때, 딱 한 마디 실수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 마디?”
“같은 원피스 입은 다른 사람을 아시는 건 아닐까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난 수요일 양 선생이 입고 온 원피스를 오늘 그녀에게 사 주었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수업 마치고 창 넓은 연결통로 복도를 걸어오는데 저 편에서 양 선생이 이것과 똑같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무척이나!
그런데 그 장면이 왜 무의식에 남아 있었을까? 평소 보이시한 양 선생이 그날따라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서일까. 하기야 대학 시절부터 벌써 안 지 십 여 년이 훌쩍 넘은 사이였다. 그 긴 시간 중에 양 선생이 치마를 입은 것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 날은 왜 원피스를 입었을까? 선이라도 보러 가는 날이었나? 아니면 노망이 났나? 아무튼 결국 그 원피스가 이 사단을 냈구나! 또 무의식적 의문이 꼬리를 물고 달아난다. 왜 이러나. 양 선생은 멋진 여자 선배일 뿐인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는 양 선생이 입었던 그 원피스를 오늘 그녀에게 사 주었을까.
 
“예뻤거든!”
 
판매원이 허리를 살짝 숙여 속삭였다. 브이 넥 유니폼 가슴골이 살짝 보였다. 애써 무관심한 척 시선을 그대로 고정시켰다.
 
“아까 애인 분이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걸 바로 찾아 내냐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고객님.”
 
예뻤다니…. 세상에! 그녀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 원피스가 뭐가 예뻤다는 거야! 정말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사귀는 동안 변변하게 선물 하나 못 사주고 오늘 드디어 애인 구실 좀 한다 싶었더니 또 이 입이 사고를 쳐 버렸다. 그녀를 만난 것은 일 년 쯤 전이었다. 지인 소개로 만나긴 했지만 담백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또 혼자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불고 할 텐데 ….
 
“혼수는 저희 숍에서 하시길!”
 
판매원은 능숙한 손동작으로 내게 입구를 가리켰다. 이제 그만 징징대고 제발 좀 나가달라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는 표정으로.
 
“실례했습니다.”
“다음에는 그 원피스가 예쁘게 잘 어울리는 분과 같이 오세요!”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건가. 내가 왜 양 선생과 여길 같이 온다는 말인가! 선배일 뿐인데 ….
 
이번에는 또 어떻게 풀어주지? 정말 단단히 화가 난 기세였는데. 그런데 왜 내 머릿속에 갑자기 양 선생이 떠올랐을까?
 
 
쇠고기 맑은 장국을 닮은 아버지.
 
* 장국 노하우: 쇠고기를 넣고 갖은 양념과 야채를 넣고 은근불로 오래 끓이기.
* 아버지 노하우: 온갖 가족사를 다 넓은 가슴팍에 부어 넣고 갖은 고뇌와 양심의 가책을 한데 저어 은근불로 오래오래 삭히기.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위가 밥을 산 것은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연한 보쌈 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유진이가 하도 성격이 까칠해서, 제가 참아야하는데 ….”
 
결국 유진이가 잘못이라는 말이다. 애 옆구리에 멍이 시커멓게 들었는데 맞을 짓을 했다는 결론이다. 며칠 째 쌀 한 톨 입에 못 넘기게 원인 제공한 인간이 내 앞에서 그래도 유진이가 까칠하단다. 나는 소주를 들어 옆에 놓인 맥주글라스에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유진이, 그만 놔 주게.”
 
내 앞이라 놀라는 척 하는 건지, 진짜 당황한 건지 사위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잘못 했습니다.”
“됐네. 긴 인생 살다보면 부부가 별 일 다 겪지. 나도 그랬고!”
 
내 눈치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사내가 하면 안 될 게 딱 하나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식솔은 건드리면 안 되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위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자네 말처럼 유진이 성격이 까칠하다면 정으로 다듬고 아껴주면서 살아야지. 내 딸이 진심이 안 통할 아이는 아닐 텐데!”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닐세. 긴 인생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네. 십 년 살면서 부지런히도 싸웠잖은가? 급기야 때리기까지 하고. 이 정도면 서로 안 맞는 걸세. 이렇게 평생을 살진 못하지!”
“유진이 사랑합니다!”
“허허, 자넨 늘 그 입으로만 사랑을 하는군!”
 
돼지국밥이 다 식어 자빠졌다. 연한 보쌈은 얇은 껍질이 오그라들면서 점점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세호는 찾지 말게.”
“아버님!”
 
사위 눈이 점점 시뻘개 지면서 광채가 일더니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유진이도 평생 정 붙이고 살아갈 피붙이 하나는 있어야지. 자네는 재혼하면 또 자식 낳을 테고.”
“선생님! 교장선생님!”
 
사위 눈에서 결국 숨었던 광기가 일었다. 광인의 입에서 나오는 교장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역겨웠다. 평생을 다해 교직에 몸담으면서 나름 자랑스럽게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 교장선생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을 짐승처럼 구타한 이 녀석에게 결국은 듣고야 마는 호칭이 되어 버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나는 자네들에게 아내를 때리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네! 그리고 비겁 하라고도 하지 않았고!”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
“비겁한 …. 벌써 딴 여자 생긴 건 진즉에 눈치 챘네. 더 이상 빈말 말게!”
 
식어빠진 국밥을 뒤로 하고 일어났다. 더 이상 두 번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유진이 생각을 하면, 주리를 틀어버리고 싶지만 냉철해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 문을 나서면서 이를 악다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유진이 인생을 더 이상 망칠 수는 없다. 얼마나 총명하고 예쁜 딸인데. 걸레만도 못한 놈!
 
국밥집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인지 온 몸이 후들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외투 안주머니를 더듬어 자동차 키가 잡히지 않았다. 국밥집에 두고 왔나보다. 화를 참으려니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국밥집으로 되돌아갔다. 모퉁이를 도는데 빨간색 볼보 한 대가 가게 반대편 도로에 정차해 있었다.
 
“자기야, 여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국밥집 입구에서 걸어 나오던 사위가 미소를 함박 지으며 도로를 성큼성큼 걸어 볼보 쪽으로 다가갔다. 방금까지 두 눈에 광기가 번뜩하던 그 녀석이!
 
“아빠!”
 
차 안에서 여자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모퉁이 전봇대를 안고 서서, 딸이 십 년 넘게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사위라는 인간을 싣고 경쾌하게 달려가는 그 빨간색 볼보를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못난 놈, 바보 같은 놈. 지 식솔에게 저렇게 모욕을 주는 놈을 두 발 성하게 가도록 놔두는 못난 놈! 바보 멍청이 ….
 
 
어머니 마음을 닮은 맑은 간장.
 
* 맑은 간장을 뜨려면 적당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어 불순물과 잡티를 잘 제거해야 한다. 가족의 평온을 지키려면 적당한 시련과 적당한 행복과 또 적당한 상처가 유지되어서 미움과 어두운 마음을 잘 제거해야 한다.
 
유진과 세호 손을 잡고 모처럼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선녀 날개옷 같이 고급스러운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가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정장을 한 벌 사 줄 생각 이었데, 내 눈은 자꾸만 하늘거리는 원피스들에 먼저 고개가 돌아봐진다. 유진이는 자기 옷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동 매장만 기웃거린다. 내리사랑이라더니.
 
“선배!”
“어, 수혁아!”
 
여성 정장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데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내가 유진에게 인사를 한다.
 
“어쩐 일?”
“아, 그냥 뭐 좀 … 선배는 ….”
 
세호가 낯선 사람 등장에 겁을 먹었는지 내 치맛자락에 매달린다. 나는 세호를 안아 올리면서 유진이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우리 학교 장 선생, 여기는 우리 어머니.”
 
사내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반듯하다. 뉘 집 자식인지 참 반듯하게 잘 자랐다. 유진이와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가 보았다. 사내가 든 쇼핑백에 여기 매장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성 매장에 무슨 … 아, 여친 꺼?”
“아, 맘에 안 든다 해서 환불하려고요!”
 
사내는 얼굴까지 붉어지면서 매장 직원에게 갔다. 자상도 하지. 저런 사내 애인은 어떤 여인일까. 우리 유진이도 못지않게 기품 있고 멋진 여인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 유진이 좋다고 목을 매고 따라다니더니 결혼하고 사람 본성이 그럴 줄이야. 오래 겪어봐야 그 사람을 안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지 싶다.
 
유진이는 세호 옷 몇 벌만 샀다. 자기 옷은 필요 없다는 통에 내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대신 지하 식품관에 들러서 모처럼 회전초밥을 먹었다. 유진은 세호 먹이느라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데.
 
“선배!”
 
좀 전에 그 사내였다. 케이크 상자를 세호에게 불쑥 내민다.
 
“집에 가서 먹어요!”
 
그리고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다시 숙인 채 달려가 버린다. 유진이도 얼떨떨한 표정이다.
 
“잘 먹을게!”
 
유진이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식품관 안을 맴돌다가 사라진다. 멀리 사내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대학 후배면 같은 국어선생님?”
“네!”
“와! 무지개 케이크다!”
 
세호가 케이크 상자를 보면서 소리쳤다.
 
“밥 먹고 할머니 좋아하시는 연시도 사 가요!”
 
남편 말이 맞다. 요즘 세상에 이혼은 흠도 아니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딸을 평생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죄다. 저렇게 반듯하게 잘 자란 남자들도 다시 만나고 예전처럼 맑은 웃음도 되찾고.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픔과 상처가 무뎌질 만큼 빨리 이 소용돌이가 유진이 곁을 지나가 버렸으면 ….
 
 
잘 발효된 곰삭은 김치 같은 할머니 인생.
 
* 묵은 지의 깊은 맛은 시간과 햇살과 인내가 주는 선물이다. 할머니 인생의 깊은 맛은 감사와 침묵과 고요가 잘 달여진 원액 그 자체이다.
 
출근길에 들렀다면서 아들이 잠시 다녀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집에서 아침상을 받고 왔을 텐데 또 배가 고프다면서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섰다.
 
“우리 어머니 김치는 정말 최곱니다!”
 
환갑 지난 아들이 팔순 노모 음식솜씨 칭찬을 하는데도 어찌나 부끄럽고 고마운지. 아들은 평생이 한결같다. 제 아버지처럼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품이었다. 며느리는 그런 성품을 가끔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천성은 어쩔 수가 없는가 보았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까지 수심에 찬 걸 보니 예삿일은 아니지 싶다.
 
한국 전쟁 때 핏덩이 아들만 품에 안고 산 속에서 한 달을 숨어 지낸 세월이 있었다. 해산한 지 열흘 만에 전쟁이 터져서 남편은 동네 장정들과 전쟁터로 떠났다. 대문 앞에 걸어둔 금줄도 체 걷기 전에 핏덩이 아들을 안고 나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시댁 식솔들 틈에 끼여 동네 어귀까지 가다가 도저히 이대로는 다 죽겠다 싶었는지 시어머니가 나를 동네 뒷산 굴에 숨으라고 했다.
 
“며칠만 참고 있거라!”
 
시어머니는 핏덩이 손자가 눈에 밟혀 발을 떼지 못했다. 나는 식솔들이 피난길에 멀어지는 것을 동네 어귀에서 울면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때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열여덟 살짜리가 핏덩이 아들을 안고 찬 밥덩이와 옷가지를 들고 뒷산으로 들어갔다. 뒷산에 숨어 풀뿌리며 나무열매며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그래서인지 젖이 잘 돌지 않았다. 아들은 품에 안겨 종일 잘 나오지도 않는 축 늘어진 빈 젖통만 빨아댔다. 아들은 점점 기운이 없어지면서 늘어져갔다. 눈물이 마를 시간조차 없었다. 제발 아들을 살려주소서. 힘없고 어린 어미의 간절한 절규에 찬 기도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째, 나는 이미 탈진해 버렸다. 어린 아들도 내 품에서 뻗어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주전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화덕에 밥 짓는 냄새까지. 퍼뜩 일어나 보니 작은 움막이었다. 어린 아들은 내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정신이 드오?”
 
푸줏간을 하던 석둘 양반이었다.
 
“지들 살겠다고, 산모하고 핏덩이는 버리고 떠났소?”
“그게 …….”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요! 허허, 고놈 밥물을 쪽쪽 잘도 빨더니만 고새 잠들었네.”
 
그렇게 한 달을 움막에서 지냈다. 한 달 새 아들은 제법 야무지게 자랐다. 석둘 양반은 동네 사람들 말처럼 상 백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품새나 말도 상스럽지 않았다. 움막 구석에는 한자와 한글 책들도 쌓여 있었다. 아들과 내가 움막에서 지내는 동안, 석둘 양반은 밤마다 동네 푸줏간으로 내려가 잤다. 그가 간간이 전해주던 전쟁 소식은 점점 나쁜 상황으로만 가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전쟁터에 간 남편도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답답한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아침, 석둘 양반이 미친 사람처럼 움막으로 달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소!”
 
나는 아들을 품에 안고 다시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무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바깥 사내 움막에서 한 달을 지냈다고 한다면, 세상에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둘 양반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돌 맞아 죽을 일이었다. 시댁 식솔들은 우리를 찾으러 산으로 달려왔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보더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와 보름이 지난 어느 저녁, 남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눈물은 벌써 메말라 있었다.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날 밤, 어린 아들을 안고 밤새 울었다. 남자라고는 씨가 마른 시댁에서 논농사며 밭농사까지 다 지으며 땅 두더지처럼 살았다. 그래야 아들 입에 피죽이라도 겨우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릿고개가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부엌 문 앞에 멧 고기 한 덩이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놓고 갔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인사를 하러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해마다 봄이 되면 멧 고기 한 덩이가 부엌 장지문 앞에 놓여 있곤 했다. 어느 눈이 많이도 내리던 겨울, 산에 올라간 석둘 양반은 두 번 다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호랑이가 물어갔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도시에 큰돈을 벌러 갔다고도 했다. 그 길로 인연은 끝이 났다. 행여 지나가는 길에라도 스치지 않을까 했지만 인연은 어른 아들을 살리는 데 까지였던가 보았다.
 
평생 잊지 못할 양반이었다. 아들이 저렇게 반듯하게 잘 자라 가정을 꾸리고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면서 인생에 큰 변고가 없는 것도 다 그 양반 은혜였다. 살아생전에 꼭 한 번은 만났으면 했는데 ….
 
 
무생채와 사춘기.
 
* 무생채 노하우: 싱싱하고 물 많은 무를 골라 날카로운 칼날로 재빠르게 잘라 즙이 최대한 소실되는 것을 막고 갖은 양념으로 잘 버무리는 것.
* 여동생 노하우: 십대의 반항과 재정립을 날카롭고 재빠르게 이루어내어 최대한 인생 낭비를 줄이고 찬란한 이십대를 맞이하는 것.
 
“오빠, 내 드라이기!”
 
요즘 오빠가 이상하다. 출근할 때마다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모른다. 강의가 없는 날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쓴다. 애인이랑 권태긴가? 어른들은 참 알다가도 모를 거 투성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럴까! 밤에 학원 갔다가 올 때면 평소하고 달리 나를 태우러 오질 않나, 단 것을 싫어하던 오빠가 달콤하고 환상적인 케이크도 종종 사다 나르고, 백화점에서 내 옷도 막 사다 준다.
 
사실 난 오빠 애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새초롬하고 가식적이다. 오빠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내가 아빠 엄마 대신인데 … 맘에 안 드는 지금 애인이랑 결혼하면 정말 곤란할 것 같다.
 
지난 번 오빠 애인이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에 불쑥 들어와서 방 청소를 해 준다고 난리였다. 오빠가 있을 때는 세상에 그런 천사가 다 없더니만,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니까 잔소리가 끝이 없었다.
 
“수하야! 이러면 너희 오빠가 얼마나 힘들겠어? 쯔쯧, 아무리 어려도 철 좀 들 어라!”
 
오빠는 그런 이중성을 알까, 모를까?
 
나한테 오빠는 아빠고 엄마다. 중학교 이 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사춘기가 최고조에 달할 나이였다. 그날 아침에도 엄마에게 있는 데로 신경질 부리며 앞머리 헤어 롤 하나만 대롱대롱 매단 채 학교로 달려갔다. 엄마와 아빠는 퇴근하고 만나,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최신형 핸드폰을 사셨다. 하도 예민하게 구는 딸에게 깜짝 이벤트를 하며 달랠 생각이셨던 거다. 돌아오던 길에 도시 고속도로에서, 음주 운전자 중앙선 침범으로 갓 길 난간에 차가 그대로 떨어졌다. 그 때 오빠는 대학생이었다.
 
그 후로 나는 사고 전에 쓰던 폴더 폰을 지금까지 가지고 다닌다. 부모님이 그 날 사셨던 최신형 핸드폰을 차마 쓸 수가 없었다. 그건 내 비밀 상자 안에 잘 간직해 두었다.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 차마 그 최신형 폰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나에게 오빠는 부모이고, 오빠에게 나는 또한 가족인 것이었다.
사고 후부터 오빠와 나는 서로에 대한 촉이 아주 빨라졌다.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랄까? 아마 내 직감이 맞는다면 오빠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제발 그 사람은 이중적이지도 내숭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고소한 산나물 숙채처럼.
 
갈수록 나 자신이 어처구니없다. 오늘도 학교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유진 선배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오늘은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유진 선배는 뭘 입어도 맵시가 난다. 지난 번 백화점에서 본 아들도 똘똘하게 생겼었다. 유진 선배 어머니도 연세에 비해 참 고우셨다. 듣기로 유진 선배 아버님은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참 평화로워 보였다. 모처럼 보는 훈훈한 풍경. 바라만 봐도 따뜻한 가족이었다. 잠시 부러웠다. 그런 따뜻한 가족을 선사하지 못하는 것이 늘 수하에게 많이 미안했다.
 
“레인보우 케이크, 우리 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고마워!”
 
식판을 들고 지나가던 양 선생이 인사를 한다. 학부 시절에는 미처 몰랐다. 양 유진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우아하고 멋진 여자인 줄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기품이 나타나는가 보다.
 
“저녁에 국어과 모임 있는 거 알지?”
“선배, 나는 좀 ….”
“뭔 소리야! 다 참석하는 분위긴데. 꼭 와!”
 
저녁에 그녀 본가에 인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벌써 두 번이나 약속을 해 두고 못 갔다. 그녀가 알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그런데 도대체 이 마음은 무엇일까. 내 마음은 벌써 모임에 가 앉아 있다. 유진 선배와 나란히 앉아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참 따뜻할 것 같았다. 유진 선배라는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할 것 같다.
 
“수혁 씨. 그만 헤어져!”
 
역시 그녀는 즉흥적이다. 모임 때문에 본가 인사를 다음 주로 미루자는 내 전화에 뜬금없는 답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해가 안 되었다. 인사를 미룬 건 분명히 내 잘못이지만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그런데 왜 항상 내가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일까.
 
“다음 주는 꼭 가자. 미안해!”
“헤어지자고!”
 
동문서답이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 있지?”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그 때 그 원피스 잘 어울리는 여자 만나! 난 수혁 씨 더 이상 너무 힘들다!”
 
원피스 … 유진 선배? …….
 
 
삼첩반상의 하이라이트, 구이나 적.
 
아내가 아침부터 부엌에서 바쁘다. 무슨 잔칫날처럼 지지고 볶고 야단이었다. 매년 있는 어머니 생신인데 오늘따라 더 부산스럽다.
 
“여보. 떡 맞춘 거 좀 찾아와요!”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시장으로 향했다. 떡도 세 가지 종류나 주문했다고 한다. 아내가 어지간히 신이 난 모양이다. 다행이다. 작년 이맘때는 마음이 참 어수선했는데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이, 긴 인생에서 들어맞을 때가 참 많다. 주문한 떡을 자전거에 싣고 옆집 액세서리 가게에 자꾸 눈이 갔다. 주춤거리며 들어가서 보석이 많이 박힌 머리핀 네 개를 골라 개별 포장을 부탁했다. 우리 집 여자는 이제 네 명이다.
 
오후에는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팔순이 넘는데도 어머니는 항상 정갈하게 집을 잘 가꾸신다.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어머니가 한사코 싫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뵙는다. 아내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다. 홀 시어머니에 외아들인 내게 시집을 와서 평생 얼굴 한 번 붉히거나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다. 가끔 유진이를 보면 젊은 시절 아내 모습이 스친다. 모처럼 딸을 볼 수 있겠다. 세호도 몇 달 사이 많이 자랐다는데.
 
어머니는 세호에게 준다고 손수 만드신 약과와 다식을 마루에 잔뜩 꺼내놓으셨다. 마당가 옛 우물터 옆 감나무에는 벌써 감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유진이네가 와 있었다. 모처럼 가족이 다 모였다. 아내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 차려 내놓았다. 어머니는 수혁 군 동생 수하를 오른편에, 세호를 왼편에 앉히시고는 마냥 함박웃음이시다. 다행이다. 어머니도 수혁 군을 좋아하셔서 정말 다행이다. 유진이가 이혼하고도 한동안은 어머니께 숨겼다. 반듯하신 성품에 용납이 안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아시게 되었고 의외로 담담하셨다.
 
“우리 유진이가 아깝더라!”
 
그 한마디뿐이셨다. 유진이 수혁 군과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 사실을 아실 때도 담담하셨다.
 
“참 잘 어울리더구나!”
 
한마디가 전부셨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이제 다시 봐도 참 잘 어울리는 가족이다. 아내는 수혁 군 동생 수하를 유난히 챙긴다.
 
“산적 좀 먹어봐라! 이 조기 구이도! 애가 왜 이리 말랐어?”
 
아내의 이런 살가운 마음에 수혁은 우리를 더 존중하고 유진에게도 그럴 수 없게 진심이다. 세호를 바라보는 수혁의 눈을 가끔 쳐다보면 그 마음이 읽힌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진심이. 좀 멀리 둘러 왔지만 모처럼 평화로운 오후였다.
 
간이 잘 베인 찰밥에 가자미 미역국, 어머니 손맛 김치에 오색 나물들, 노릇하게 잘 구워진 조기 구이와 산적들. 거기다가 빛깔 좋은 잡채와 갈비찜까지. 푸짐한 한 상이다. 초가을 햇살이 거실 가득 비추며 나른한 포만감이 더욱 깊게 밀려오는 기분 좋은 오후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그런 가을 오후, 찬란한 만찬이었다.
 
 
나는 지금 수혁이와 재혼을 해서 세호랑 수하랑 같이 살고 있다. 내 오만스러움과 자만심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었던 인생의 오차였다. 재혼이라니. 그러나 때로는 그런 오차가 적당한 범위 안에서는, 인생에 자만을 걷어낼 만큼의 적당한 긴장과 감동을 선물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보고 지냈지만 늘 그가 내 시선 안에 있었고 의식 속에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십오 년이 걸렸다.
세 끼 밥상에 대한 오만처럼 사람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나 자신에게조차 솔직함을 잃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긴 인생을 3첩 반상처럼 살면 어떠한가?
 
복잡하고 힘겹고 때로는 고달파 벗어나고 싶은 이 긴 인생을, 단출한 한 끼 밥상처럼 소박하고 소중하게 살아낸다면?
 
때로는 뜨겁지만 천천히 불어 식혀서!
때로는 매콤하지만 구이와 함께!
또 때로는 깊은 곰삭음으로 그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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