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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by 안노27 2024. 5. 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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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사십삼 년 전이라고 한다.

  내가 새벽을 뚫고 이 골목으로 들어온 것이.     

  78년생 말띠.     

 

  세상에서 가장 가녀린 핏덩이 갓난아기 모습으로 어머니 기름때 절은 포대기에 싸여 이 낡은 골목에 운명처럼 나타났다고. 

  누나는 잊을 만하면 말한다. 깊은 겨울밤, 자다가 눈을 뜨니 커다란 방에 혼자만 누워 있었더라고. 혼자 울다가 찬마루에 맨발로 오그리고 걸어가 마당을 봐도 싸락싸락 하얀 눈만 쌓이고 있었더라고. 옆 방 세 들어 살던 언니들이 달래며 “엄마 곧 오실 거야” 했더라고. 한참을 언 발로 있는데 대문이 삐걱 열리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줄지어 들어오더라고. 그런데 엄마가 품에 보물처럼 뭔가를 소중하게 꼭 안고 들어오더라고.      

  그 소중한 핏덩이가 나였단다.     

 

  누나는 아기인 나를 업고 빨래터에서 걸레도 빨고 똥 기저귀도 빨았단다. 나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아버지와 갔다고 지금도 흥분한다. 1978년 초등학교 입학식. 그때 아버지 손잡고 입학하는 아이는 누나밖에 없었단다. 겁도 많고 고집도 센 누나는 내 똥 기저귀 빨기 싫어서 가끔 엄마에게 반항하다가 싸릿대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고.      

 

  우리 집은 따뜻한 남쪽 작은 리아스식 해안가 도시에 있었다. 아버지는 어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했다. 그래서 우리 집 부엌 옆 처마 밑에서는 언제나 해산물이나 생선 말리는 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몇 년 후, 나는 변두리에 살던 우리 집에서 한참 떨어진 시내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교회 유치원에 다녔다. 누나는 또 악을 쓰고 고집을 피웠다. 자기는 유치원도 안 보내주고 동생들만 보낸다고. 남녀 차별한다고. 나보다 세 살 많은 형도 사실 시내 교회 유치원을 졸업했다. 누나만 유치원을 안 다녔다. 누나가 그럴 때마다 형과 나는 못 본 척했다. 누나는 억울해서 악을 쓰면서 조건을 달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에 걸- 스카우트 단원 입단에 미술 학원에.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누나는 맨날 졸라댔다. 누나가 그러는 동안 형과 나는 무럭무럭 자랐고 둘이서 맨날 동네 애들과 어울려 다녔다. 골목에서 딱지치기, 자치기, 구슬 따기 … 동네 애들 구슬은 우리 형제가 다 휩쓸었다.      

 

  우리 집은 골목 제일 안쪽이다. 왼쪽 두 번째 2층 양옥집 빨간 대문 아영이는 내 첫사랑이다. 88 올림픽 때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디선가 얻어 입은 88 올림픽 티셔츠를 걸치고 골목 구석 아지트에서 우리들 기지를 만들 그런 때였다. 그런데 아영이는 대장인 나를 우습게 쳐다봤다. 공부도 잘하고 옷도 비싼 메이커만 입고 다녔다. 골목 안 우리들과는 놀지도 않았다. 곱게 기른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길게 나풀거리면서 골목을 들어서면, 골목 안 사내애들은 숨어서 아영이를 훔쳐봤다.      

 

  “너네 누나 공부 겁나게 잘한다며?”     

 

  아영이가 일 년 만에 내게 말을 걸었다.     

 

  “어? 으- 응!”

  “인문계에서 일 이등 한다며?”

  “몰라, 난!”

 

  그 뒤로 지나다가 나를 만나면 아영이는 누나 안부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집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아영이는 누나랑 점점 친해졌다. 우리한테는 수학 가르치다가 꿀밤을 몇 대나 때리는 누나가, 아영이한테는 진짜 천사처럼 잘해 줬다. 

 

  형이랑 나는 서로 한 패가 되기로 했다. 여자들을 이기기로. 누나랑 아영이 신발에 껌을 붙이기도 하고 콜라를 몰래 쏟아 붙기도 하고. 누나랑 아영이가 둘이서만 빠져 듣던 부활이며 들국화 테이프를 죽죽 늘어놓기도 하고. 그러면 누나는 지붕 뚜껑 날아가게 소리 지르고 난리를 피웠다. 그래도 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다면서 형은 항상 발뺌을 했다.      

 

  중학교 입학을 하고부터 아영이를 보는 날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누나는 기를 쓰고 공부해서 원하던 대도시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아영이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학교 마치고도 한참 떨어진 아영이네 여자중학교 근처를 돌아서 집으로 왔다. 그래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고 아영이네는 먼 친척에게 집을 통째 빌려주고는 큰 도시로 이사를 가 버렸다.    

  

  형은 누나와는 달리 공부를 정말 싫어했다. 아버지 강압에 반항하다가 결국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형은 아버지 몰래 산 오토바이를 골목 구석 오래된 아지트에 숨겨 두었다. 내 입을 막으려고 가끔 나를 태우고 근교까지 나가곤 했다.      

 

  내가 대학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할 시절, 형은 상병 달자마자 하사 지원을 했다. 형의 대학 입학을 간절하게 바라던 아버지 가슴에 일부러 비수를 꽂은 것이다.      

 

  우울한 재수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잡지사 취직해서 잘 다니던 누나가 갑자기 결혼 상대를 데리고 골목을 들어섰다. 독신주의자라고 외쳐대던 누나가 그 사내 얼굴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누나는 다를 줄 알았는데. 

 

  누나 결혼식 전날, 형은 특별 휴가를 받아 골목 안집 우리 집 대문을 열었다. 피부가 탄력이 넘쳤고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형은 내 방에 보급품 담배며 야한 잡지들을 하사품처럼 숨겨두고 갔다. 자기는 죽어도 대학 같은 건 안 간다면서.      

 

  누나는 결혼을 하고 큰 도시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누나 곁으로 보내버렸다. 큰 도시가 학원도 훨씬 낫다면서.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 삼 남매를 잘 몰랐다. 형과 내가 매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똑똑한 누나를 뺏긴 것 같아 처음에는 그냥 싫었고 결혼과 동시에 누나의 모든 사회생활이 차단된 것 같아 나중에는 더 싫었다. 매형이 회식으로 늦는 날이면 누나는 재수생 막둥이 동생 나를 붙잡아 앉혀두고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나는 결국 삼수까지 실패하고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어물 가게 일을 도우면서 입대만 기다리고 있었다. 형에 이어 나까지 아버지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 골목 어귀에 들어설 때마다 땅만 보고 대문까지 걸어 들어왔다. 수 십 년을 골목 어귀 들어설 때마다 제일 안집 우리 집이 대장이나 되는 것처럼, 줄지어 양 옆으로 앉은 십여 채 다른 집들을 일일이 간섭하고서야 대문에 발을 내디디는 분이었다. 감나무 가지가 담장 너머 골목까지 뻗은 집은 주말에 전지작업을 꼭 도와줘야 했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곰보처럼 숭숭한 집은 날 잡아 칠을 도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 시절 나는 번호 없는 죄수가 되어 비디오 가게에 만화책 빌리러 가는 것도 골목 사람들 눈치를 살필 지경이었다.   

   

  “너, 기형이 맞지? 박 기형!”     

 

  아영이었다. 군대 입대 이틀 전날, 친구들과 시내 술집을 밤새 돌아다니며 위로를 주고받던 날. 하필이면 그날 아영이를 다시 만났다. 다음 날 입영열차를 타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빨간 대문 집에서 아영이 나왔다. 운명은 언제나 내 편은 아닌가 보았다. 아영은 멋진 대도시 대학생이었다. 곧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고. 내가 연병장에서 뺑이 칠 때 아영이는 먼 나라 도시 근사한 노천카페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나도 아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을 걸어 나갔다.      

  제대한 후 얼마 안 있어서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나는 그때부터 건어물 가게를 맡아 운영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다. 누나는 대도시에 살았고 형은 강원도에서 직업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골목 안집 우리 집만 평생 쓸고 닦아 온 사람이었지, 장사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건 막둥이인 내 몫이었다.     

 

  서른 즈음, 나는 형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중매로 세 번 만나고 결정했다. 어차피 인생은 거기서 거기란 걸 이미 깨달아버린 나이였다. 착하게 생겼고 순하게 생겼고 튀지 않을 만큼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결혼 후에도 나는 골목 안집 우리 집에서 아내와 아버지 어머니와 살았다. 형은 결혼도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빨간 입술의 여자를 데려 왔다. 형의 결혼식장에서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었다.     

 

  아내가 연년생 딸 아들 둘을 낳고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즈음, 아버지는 다시 쓰러지셨다. 그 길로 두 번 다시 일어나시지 못했다.           

  골목 어귀에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 있었고 아버지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고개를 숙인 아버지가 이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골목 어귀로 돌아오시지 못했다. 

 

  골목 안 십여 채 집들에도 이제는 경사보다 조사가 더 잦았다. 아내와 나는 홀로 남은 어머니 건강을 더 챙겨야 했다.      

  올해로 마흔셋이 되는 나.

 

  연년생 두 아이가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어, 어릴 때 우리처럼 골목 구석 아지트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골목 안 다른 집들은 그 사이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나처럼 결혼해서 사는 친구도 두어 명 있다. 

  우리는 해지는 여름 저녁이면 이렇게 골목 어귀 평상에서 막걸리 사발을 건네며 하루를 마친다. 사십 년을 이 골목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온 내 벗들.      

 

  나는 황혼의 태양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득 골목 안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열린 대문 안 마당에서, 구부정한 허리를 한 어머니가 화단 텃밭에서 오이를 따고 있었다. 수돗가에서 방망이질하던 아내가 만신창이 된 북어를 들고 다른 손에 고추장 단지를 들고는 대문을 넘어 환하게 웃으며 골목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수줍던 신부의 그 떨리던 손으로.     

 

  아! 이것이 인생이구나!     

  골목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자란 내 벗들. 

  첫사랑 아영이를 훔쳐보던 이 골목으로, 떨리는 신부 손을 꼭 잡고 걸어갔던 그때. 아버지의 들것이 나갔던 그 자리로 연년생 두 아이가 태어나 안고 왔던 그 길. 어릴 적 우리처럼 두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러 달려 나갔던 그 골목!

 

  언젠가 나도 들것에 실려 이 골목을 떠나겠지. 그러면 이 길을 또 내 아이들이 걸어오고 또 걸어 나가겠구나!     

  이 골목 이 흙. 

  바닥과 벽에 새겨진 이 수많은 추억들과 삶의 흔적들. 

  이것이 골목 위에 새겨진 내 인생이구나!     

  멀리 황혼이 점점 붉게 물들고, 벗들과 내 얼굴에도 서서히 황혼이 물을 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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