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겨울 햇살이 조심스럽게 부서지는 오후.
문득 오래 전부터 놓여있던 몽땅연필들을 발견하다!
의식의 흐름을 놓아버린 채 가만히 유리병 속을 들여다보다.
그 속에 내 과거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 년 전 초여름, 따뜻한 남해 지족 마을에서 체취한 초록마을 유리병.
동행했던 지인 두 명.
지금보다 조금은 순수했고 지금보다 조금은 덜 거짓스러웠다.
여행지에서 가져온 유리병 속에는 굴러다니던 몽땅연필들을 하나 둘 집어넣었다.
그때는 별 생각없이 그랬다.
삶이란 무의식적 행위 속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던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내 책상 여기저기서 먼지 묻고 때 묻어가며 긴 시간 나를 지켜보면서 견뎌왔을 터.
그래서 이제 더는 손잡을 틈도 없이 닳고 닳아버린 것들.
한동안 아끼던 사각사각 연필들.
가끔 다시 유리병에서 꺼내 하얀 백지 위에 조심스럽게 뭔가 써 보기도 하다.
지인에게 안부 편지를 써 볼까.
다시 연애 편지를 써 볼까.
연장자들에게 감사 편지나 써 볼까.
수 십 년 전 긴 겨울 밤에는
웃풍 센 방 안에 홀로 앉아서
연필 끝을 꾹꾹 눌러가면서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첫사랑 누군가에게 정성스러운 편지를 쓰곤 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간절한 기원을 담아.
손 편지를 써 본 지가 수 십 년은 되지 싶다.
겨울 오후, 우연히 발견한 유리병 속 몽땅 연필이 지난 시절 간절했던 사람들과 기억들을 다시 소환하다.
그러하면, 내 지난 시간들을 몸통에 남은 흔적들처럼 간직한 이 나무 연필들 속에서 회상하고 통찰한다면.
닳아진 상처 투성이 몽땅연필들.
마치 반평생 살아온 내 삶의 흔적들 같다.
이제는 체념하고 포기해 버린 꿈들,
놓아버린 가족들,
다시 꺼내보기도 서운한 첫사랑,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깊은 상처들.
그래서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나를 똘똘 뭉쳐
에어캡 속에 가두어 버린 그 어디에도 이젠 찾아볼 수 없는 내 실체.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렇다면.
저 유리병 속에 반평생 지은 죄와 상처와 분노와 미움과 증오들을
몽땅연필과 함께 다 가두어버리면 어떨까?
또 가끔 너무 분에 못 이겨 미칠 때는
저 몽땅연필 한 자루 꺼내 세상 누군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
어쩌면 몽땅연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제일 먼저 쓸 지도 모르다.
아!
태초부터 우주 끝까지, 시간의 시작에서 무한까지.
그 찰나 거대한 우주 한가운데 시간의 틈 속 어딘가 스쳐지나가듯 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
그것이 바로 생존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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