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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대한 담론 사물-몽땅연필

에세이

by 안노27 2024. 5. 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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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겨울 햇살이 조심스럽게 부서지는 오후.

문득 오래 전부터 놓여있던 몽땅연필들을 발견하다!

의식의 흐름을 놓아버린 채 가만히 유리병 속을 들여다보다.

그 속에 내 과거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 년 전 초여름, 따뜻한 남해 지족 마을에서 체취한 초록마을 유리병.

동행했던 지인 두 명.

 

지금보다 조금은 순수했고 지금보다 조금은 덜 거짓스러웠다.

여행지에서 가져온 유리병 속에는 굴러다니던 몽땅연필들을 하나 둘 집어넣었다.

그때는 별 생각없이 그랬다.

 

삶이란 무의식적 행위 속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던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내 책상 여기저기서 먼지 묻고 때 묻어가며 긴 시간 나를 지켜보면서 견뎌왔을 터.

그래서 이제 더는 손잡을 틈도 없이 닳고 닳아버린 것들.

한동안 아끼던 사각사각 연필들.

가끔 다시 유리병에서 꺼내 하얀 백지 위에 조심스럽게 뭔가 써 보기도 하다.

지인에게 안부 편지를 써 볼까.

다시 연애 편지를 써 볼까.

연장자들에게 감사 편지나 써 볼까.

 

수 십 년 전 긴 겨울 밤에는

웃풍 센 방 안에 홀로 앉아서

연필 끝을 꾹꾹 눌러가면서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첫사랑 누군가에게 정성스러운 편지를 쓰곤 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간절한 기원을 담아.

 

손 편지를 써 본 지가 수 십 년은 되지 싶다.

 

겨울 오후, 우연히 발견한 유리병 속 몽땅 연필이 지난 시절 간절했던 사람들과 기억들을 다시 소환하다.

 

그러하면, 내 지난 시간들을 몸통에 남은 흔적들처럼 간직한 이 나무 연필들 속에서 회상하고 통찰한다면.

 

닳아진 상처 투성이 몽땅연필들.

마치 반평생 살아온 내 삶의 흔적들 같다.

이제는 체념하고 포기해 버린 꿈들,

놓아버린 가족들,

다시 꺼내보기도 서운한 첫사랑,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깊은 상처들.

 

그래서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나를 똘똘 뭉쳐

에어캡 속에 가두어 버린 그 어디에도 이젠 찾아볼 수 없는 내 실체.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렇다면.

저 유리병 속에 반평생 지은 죄와 상처와 분노와 미움과 증오들을

몽땅연필과 함께 다 가두어버리면 어떨까?

 

또 가끔 너무 분에 못 이겨 미칠 때는

저 몽땅연필 한 자루 꺼내 세상 누군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

어쩌면 몽땅연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제일 먼저 쓸 지도 모르다.

 

아!

태초부터 우주 끝까지, 시간의 시작에서 무한까지.

그 찰나 거대한 우주 한가운데 시간의 틈 속 어딘가 스쳐지나가듯 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

 

그것이 바로 생존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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